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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용산기지를 가다
'700 여년 외세점령의 산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요약]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총 80여 만 평의 주한미군기지로, 1945년 광복 후 미7사단 병력이 일본군의 병영을 접수해 현재의 주한미군사령부로 발전했다. 그러다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협정에 따라 2017년 7월 미8군사령부가 평택기지로 이전한 데 이어 2018년 6월 주한미군사령부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주한미군의 이전이 완료됐다. 이에 용산 기지는 우리 정부에 반환돼 추후 국가 도시공원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총 80여 만 평의 주한미군기지로, 1945년 9월 미 극동군사령부가 오키나와 주둔 제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면서 미군의 용산 주둔이 시작됐다. 미 7사단은 1945년 9월 9~30일까지 서울과 인천에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주요 시설물 보호 및 치안유지를 담당했으며, 이때 24군단사령부가 용산에 설치됐다.
이후 1949년 1월 24군단 병력이 철수하고 마지막 남은 5전투연대도 그해 6월 모두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미 군사고문단 창설로 482명의 미군만 남았으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유엔군 일원으로 다시 한국에 투입됐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인 1957년 7월 주한미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정식으로 창설됐다.
그러나 서울 도심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용산기지는 지역민원과 시민들과의 마찰 등으로 이전 논의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에 1990년 한미 양국의 기본합의서 체결로 주한미군 이전사업이 추진됐으나, 비용 문제 등으로 1993년 중단됐다. 그러다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연합사령부와 유엔군사령부를 포함한 미군기지를 모두 평택, 오산으로 이전하는 내용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2004년 12월 용산기지 이전협정이 국회 비준 동의절차를 거쳐 '미군 이전 평택지원법'이 제정됐다. 당시 한미 양국은 2015년 말까지 평택 주한미군 기지 공사를 완료하고 2016년까지 용산과 동두천ㆍ의정부 미군 기지의 이전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하였다. 여기에 2006년 서울시는 기존 미군이 사용하던 용산 기지 부지를 국가공원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선포하였고, 이후 평택으로의 용산기지 이전이 완료되는 2017년부터 단계적으로 공원조성 공사를 시작해 2027년 사업을 완료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2006년 7월 국방부는 주한미군기지 이전사업단을 창설했고, 2007년 12월에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사업 기공식이 진행됐다.
이후 주한미군 중·대대급 부대 이전은 2013년부터 시작됐고, 주한미군 지상군 전력의 핵심인 미 8군사령부는 2017년 7월 용산에서 평택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2018년 6월 주한 미 8군과 7공군, 해군, 해병대 등을 예하에 둔 주한미군사령부가 평택으로 이전함에 따라 주한미군 평택 이전은 모두 완료됐다. 다만 한·미 연합사령부와 기지 내의 숙박시설인 드래곤힐 호텔은 용산에 남기로 했으나, 연합사의 경우 한국 국방부 영내의 7층짜리 독립 건물로 2018년 말까지 이전하는 방향이 추진되고 있다.
용산기지 역사
서울 도심의 용산 일대에 외국군이 처음 들어온 것은 13세기로, 고려 말 한반도를 침입한 몽고군이 당시 용산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양전투에서 패한 왜군 고니시(일본 장수) 병력이 원효로 4가에, 가토 병력이 청파동 일대에 각각 주둔했다. 그리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병력 3000명이 주둔한 데 이어, 러·일전쟁을 앞둔 1904년 일본이 용산 일대에 수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할 수 있는 병영을 지었다. 당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내세워 용산 지역의 부지 300만 평을 헐값에 강제수용했다가 이 가운데 115만 평만 군용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 군용지가 바로 추후 용산 미군기지의 기반이 됐다. 용산 지역에 부지를 확보한 일본군은 이곳에 조선주둔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20사단 사령부를 설치하고 2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만주 침공의 후방기지로 삼았다.
1945년 해방 후 용산기지는 미군 손에 넘어갔다. 그해 9월 2일 발표된 한반도 분할점령을 공식화하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미군이 남한을 점령, 미7사단 병력 1만 5000명이 용산에 진주, 일본군의 병영을 모두 접수하면서 용산기지를 차지했다. 이어 터진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1953년 7월 휴전 후 용산기지를 다시 사용하게 되면서 용산기지는 한국이 미군에 제공하는 공여지 형태로 정리됐다. 이후 미군은 주한미군사령부(1957년)와 한미연합사령부(1978년)를 창설하면서 용산지역을 사실상 관할해 왔다. 용산 지역의 경우 가까운 한강을 통해 상륙한 뒤 남산과 북한산을 점령하면 서울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 데다 운송이 편리하고 퇴로가 항상 확보돼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주둔하게 된 것이다.
용산기지의 구성
평택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용산 미군기지에는 '한·미연합방위체제'의 핵심 지휘부가 위치해 있었다. 삼각지 사거리와 이태원을 잇는 2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는 용산기지는 총 80여 만 평 규모로, 1만여 명의 주한미군과 군속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업무 및 지원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북쪽 지역은 제5정문(게이트 5)에서 시작해 남산의 남단에 위치한 후암동 용산고교 사이의 메인포스트(main post)로, 주한미군사령부와 8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등 지휘부가 있다. 남쪽 지역은 제10정문(게이트10)을 지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위치한 용산가족공원까지의 사우스포스트(south post)로, 주거시설과 병원 등이 배치돼 있다.
지휘시설인 메인포스트에는 3층 건물의 주한미군사령부 겸 한미연합사령부와 군사고문단 및 예하 참모부 건물이 나이트필드 연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연병장의 서쪽에 위치한 'CC서울'이라는 지하벙커는 유사시 지휘부가 임시로 들어가 한반도 전쟁을 총지휘하는 곳이다. 특히 CC서울에는 인공위성과 U-2R 고공정찰기 등이 수집한 정보를 오산 전역항공통제센터(TACC)를 통해 제공하는 등 한반도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첨단장비가 설치돼 있다. 나이트필드연병장의 동쪽에는 전술지휘통제(C4I)체계가 있으며 주거지역인 사우스포스트에는 드래곤 힐 호텔, 그 건너편 서쪽에는 초중고교가 있다.
출처: 시사상식 사전